[엘림하랑] 동양의 한 요괴의 이야기
동화...? 같은 느낌을 내고 싶어서 쓰다보니 캐붕이 좀 있습니다..
크림색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 뾰족하고 기다란 뿔 2개를 가진 요괴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욕하는 인간들을 싫어해 마을과 많이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동안 인간과 마주할 일 없이 지내던 중, 한밤 중에 들린 쿵 소리에 소리가 난 곳으로 향한 요괴는 흙과 상처투성이인 상태로 의식을 잃은 백발의 인간을 발견했고 잠깐 머뭇거리다 인간을 제가 지내는 곳으로 데려갔다.
빠르게 치료를 마친 요괴는 인간을 지그시 바라보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급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치료 해주긴 했지만 제 앞에 있는 이도 결국 인간이었다. 그들처럼 겁 먹거나 싫어할 게 뻔했다. 최악의 경우, 저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 무서운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저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그걸 안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상상 되기 때문에 싫었다. 그렇기에 요괴는 이 인간이 눈을 뜨면 바로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 인간이 눈을 뜨기 전까진. 일주일이 지나서야 눈을 뜬 인간은 눈을 몇 번 끔뻑이다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러다 요괴와 눈이 마주쳤다. 청록색 눈동자와 긴 속눈썹. 다른 인간들보다 예쁘게 생긴 인간은 놀라기는 커녕 멍하니 저를 바라보다 겨우 이 정적을 깨트렸다.
"당신이 저를 구해주신 건가요?"
"…그렇다만?"
"아… 고…마워요."
그 떨떠름한 한 마디 덕분에 다시 정적이 흘렀고 그와 동시에 요괴는 인간을 내쫓는데 수월해질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저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면 편하니까. 그럼 이제 정신도 차렸겠다, 마을로 가는 길을 알려줄 테니 돌아가라 하니 인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어설프게 상처가 완전하게 낫지 않았다며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면 마을에 갈 정도는 된다고 하니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아무는 속도가 느리다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가면 짐승에게 당할 게 뻔하다는 터무니없는 소릴 했다. 그러니 일주일 동안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요괴는 헛웃음만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내쫓으려 했으나 그 동안 음식이고 빨래고 다 하겠다며 제발 일주일만 더 있게 해달라는 말에 그러지 못 한 요괴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그러라고 허락해주었고, 인간은 밝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인간은 자주 웃고 떠들었고 그 덕분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이런 저런 이야길 했고 그럴 때 마다 요괴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만 했다. 특히 마을 이야기를 할 땐 더욱 그래야만 했다. 마을 사람들이 상냥하고 다정하다는 얘기는 다 인간들 한정이니 들어봤자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그리고 어차피 이 인간은 일주일이 지나면 마을로 돌아갈 테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테니 딱히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이 인간 또한 그저 갑자기 찾아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추는 소나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고. 그렇게 요괴는 하루 빨리 일주일이 지나길 기다렸고, 그토록 기다리던 마지막 날이 되자 약속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갈 생각에 조용해진 건지 평소와는 다르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느릿느릿하게 준비하는 것도 이 곳에 더 있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저 인간도 다른 인간들과 다를 게 없는데. 준비를 마친 인간에게 돌아갈 길을 설명해주고 얼른 가라며 재촉하자 인간은 알겠다며 순순히 돌아갔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가기 싫은 것처럼 굴더니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요괴는 안심했다. 이제 그 떠드는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어졌고, 뭣보다도 싫어하는 인간과도 안녕이었으니까. 왠지 모를 아쉬움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감정이라 생각하며 요괴는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적어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다시 한 번 들린 쿵 소리에 놀라 소리가 향한 곳으로 간 요괴는 이번엔 의식을 잃지 않고 아파하는 인간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이런 인간은 처음 보네. 대체 뭐가 문제야?"
"길을 잃어서 돌아오다가 넘어져서… 어,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죠!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헤어질 뻔 하기도 했고, 또-"
또 다쳐온 인간을 치료해주며 요괴는 한숨만 내쉬었다. 돌아가라고 길도 알려줬는데 가다가 길을 잃어서 돌아오다가 넘어졌다니, 그리고 그걸 또 좋게 생각하다니.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할 정도였다. 일주일만 더 있게 해달라고 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예상 되는 건 여러 가지였지만 뭐가 되었든 다 본인만 손해인 것 뿐이었다. 다 의미 없는 짓인게 뻔한데. 치료를 마치고 무슨 생각으로 여길 왔냐고 물으려는 순간, 인간이 먼저 이름이 뭐냐는 질문을 던졌다. 자기는 하랑이라며 이름이 궁금하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름? 내게 그런 게 있었나? 애초에 이름이 뭐냐고 묻는 인간도 제 앞에 있는 인간이 처음이었다. 늘 괴물, 요괴란 소리만 들었었으니까. 그런 건 없다고 말하니 하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럼 자신이 지어주겠다며 나섰고, 요괴는 그런 하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몇 년동안 그렇게 느꼈으니까.
"엘림스, 어때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 말에 요괴는 관심 없다는 듯 알아서 하라며 치료 하면서 사용한 것들을 정리해갔다. 어차피 날이 밝는대로 바로 돌려보낼 것이고 다시 찾아오지 못 하게 경고 해두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날이 밝자마자 하랑을 다시 돌려보냈고 다시 찾아온 평화에 안심하고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딱 하루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 날 이후로 하랑은 매일같이 찾아와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고 저녁이 되면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였다. 경고는 까맣게 잊은 건지, 아니면 무시한 건지 저를 엘림스라고 부르며 떠들어댔다. 아무리 내쫒아도 다음 날이 되면 방긋 웃으며 얼굴을 보이니 지쳐버린 요괴는 네 맘대로 하라며 내쫒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자신을 해칠 생각은 없어 보였고, 있다 한 들 딱히 무서울 것도 없었기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그 말에 하랑은 밝게 웃었고, 지겹지도 않은지 정말 매일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늘 궁금하지도 않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 하루는 하랑이 늦게까지 오지 않았다. 햇빛이 쨍쨍해도 덥다면서도 왔고, 비가 와도 홀딱 젖은 상태로 와선 웃곤 했었다. 처음엔 무슨 사정이 있어 오지 않나보다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딘가 이상했던 하랑의 행동이 떠올라 그렇게 생각하긴 힘들었다. 하루는 이렇게 다른 인간들 몰래 왔다가 가도 괜찮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에 하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아마 괜찮을 거라며 웃어 보인 적이 있었다. …괜찮기는 무슨. 딱 봐도 걸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이 곳을 매일 들락날락 했으니… 들키지 않는 건 어려울 거고, 지금까지 오지 않은 걸 생각하면 들켜서일 가능성도 컸다. 정말로 들킨 거라면 그 인간은 오지 못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용해지니 좋을 것 같았지만 어째 마냥 좋을것만 같진 않았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쯤, 근처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꽤 느렸지만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이내 수풀을 해치고 얼굴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하랑이었다. 또 겁을 상실하고 찾아온 산짐승인 줄 알았던 요괴는 벙쪄서는 어쩌다 보니 늦었다는 하랑을 아무 말 없이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그리 좋은 날은 아니지만 특별한 날이라 늦었다며 웃는 하랑에 요괴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이 생겨 오지 못 하게 된다면 마음이 그리 좋진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풀을 해치다 생긴 하랑의 잔상처를 치료해주자 하랑은 웃으며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가도 되냐며 허락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 없는 뻔뻔함에 요괴는 헛웃음을 하고는 쉽게 허락해주었다. 안된다고 해도 지금 나가면 산짐승에게 당할지도 모른다며 또 뭐라 할 게 뻔했으니까.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일어난 하랑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던 요괴가 다가가자 자기 때문에 깼냐며 미안한 듯 웃으며 사과했다. 평소였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달빛에 비쳐 보인 하랑의 표정이 억지 웃음이었음을 알아챈 요괴는 무슨 일이 있으면 평소처럼 말하라며 옆에 앉았다. 그에 하랑은 그런 거 없다며 둘러대다 길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처음 여길 온 이유는 오늘이 기일이었던 동생을 따라가고 싶어서였어요. 마을 사람들이 요괴를 만나면 죽는다고들 했었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쓰러진 날 치료해주고 지금까지도 공격 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헛소문이었단 걸 깨닫고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당신에게 보답하고 싶어 매일 찾아왔던 거였어요. 실은 죽는 게 두려웠거든요. 하지만 그러면서 느끼게 된 행복이 커질 수록 동생 생각이 났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얘길 하던 하랑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고자 다시 억지웃음을 짓자 요괴는 말 없이 하랑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 어둡고 좁은 길을 하랑이 다치거나 넘어지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며 걷던 요괴가 멈춰선 곳은 호수가 있는 곳이었다. 그 호수는 달이 호수를 비춰주는, 이 곳에서 유일하게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갑자기 밝아져 눈을 몇 번 끔뻑이던 하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 덕분에 별도 몇몇 보였고 호수는 더욱 반짝일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우연히 발견한 후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찾던 곳이었기에 요괴는 하랑을 이 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좋은 말을 해주지 못 했고, 토닥여주지도 못 했다. 그저 기분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 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안 하랑은 요괴에게 다가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엘림스 당신은 정말 좋은 요괴에요."
달빛에 비춰 보인 하랑의 모습은 그 호수보다도 더 아름다웠다.
그 날 이후로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하랑은 매일 같이 찾아와 또 마을 이야기를 해줬고 요괴는 듣지 않으려고 하느라 바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계속 하랑이 신경 쓰인다는 점이었다. 평소 오는 시간보다 늦으면 불안해졌고, 하랑이 웃을 때 마다 무언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 또한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고, 그렇다고 해서 하랑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 감정이 좋은 감정이던 아니던 그냥 말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하랑이 급히 찾아오면서 평화는 너무도 쉽게 사라져 버렸다.
"에, 엘림스! 도망 가야 해요! 얼른…!"
여기까지 쉬지도 않고 뛰어온 건지 제대로 숨도 쉬지 못 하는 하랑에게 요괴는 우선 진정하고 괜찮으니 천천히 설명하라 하자 하랑은 마을 사람들이 우릴 죽이려고 오고 있다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말에 요괴는 하랑이 이 곳을 오고 가는 것을 다른 인간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아채곤 계속해서 하랑을 진정 시켰다. 어차피 인간들은 진심으로 공격하면 다 죽는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건 혼자일 때의 일이고, 하랑이 옆에 있다면 제어가 가능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랑 몰래 인간들을 죽이면, 과연 하랑은 그런 자신을 좋아할까? …아니, 그럴 리가. 겁 먹고 자신을 떠날 게 뻔했다. 다른 인간들처럼.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쪽을 택한 요괴는 꼭 필요한 것만을 챙기고 하랑과 함께 그 곳을 떠났다. 오랫동안 지냈고 많은 일이 있었던 그 곳을.
하랑 덕분에 인간들에게 쫒겨 다닐 일 없이 그 곳과 많이 떨어진 곳까지 향할 수 있었던 요괴는 인적이 드문 곳에 오두막을 짓고 하랑과 이것 저것을 알아가며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한다.